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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慶森林 (1994)


닌나난나

닌나난나    박상수


함께 놀아요 보리수꽃차 나눠 마시고 어리광 피우기 놀이해요 나만의 부티크를 갖고 싶고, 여섯 배는 느리게 움직이지만 자꾸 멍이 들죠 난 유일의 목소리를 가졌고 비밀이 많아! 외쳐보지만 행복해지진 않아요, 걸스카우트 매듭을 배웠는데 제대로 묶는 게 하나도 없죠 어리광 좋아해요 사랑 얘기만 하고 세상을 몰라요. 

근시안 2

근시안 2    신해욱


시선이 얽혀버렸다.
당신이 지나치게
내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먼 곳의 당신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지만
또한 나에게로 육박하는
이 돌연한 미소.

내 얽힌 시선 속에서
당신은 배후와 독립적이다.
내가 멀리할수록
나에게로 오고
다른 방식으로만 당신은
물러서려 하지만
그러나 구도는 완결된 것.

어떤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시선이 이제는
나의 두 눈과 얽히고 있지만
같은 비율로 여전히
당신은 명료하고도 막막하다. 나는
눈을 놓는다.


첫사랑

첫사랑    박상수


우린 이불을 뒤집어썼다 손전등을 켜놓고 열이 나는 뺨을 핥기도 했다 난 도마뱀, 달아나는, 넌 나를 보면서 귓볼을 만지는 애였다

초경의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열은 내릴 줄을 몰랐다 거웃이 무성한 아이들을 따라 몰려다녔도 도망치는 녀석들을 밟기도 했다

사라진 소설책을 화장실에서 들고 나왔던가? 넌 찢어진 우산처럼 펼쳐져 나를 바라보았지만 난 부러진 백묵, 내던져져 마룻바닥을 굴러다녔다

부서진 마룻장 밑에선 얼룩무늬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가지고 놀다 주먹을 쥐면 살갗으로 스며드는 움직임

"넌 높은 지능을 가진 포유류야, 난 무서워."
너의 편지를 읽고 있으면 몸이 달아올랐다.

너라는 캔버스

너라는 캔버스    강기원


무엇이었을까

원래 네 모습은

너라는 캔버스 위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환상의 몽타주

새벽 안개의 눈동자

콧날 위 편백나무 숲

입술의 악보

곧은 두 다리 사이 바다로 난 철길

도무지 알 수 없는

텅 빈 네 이마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것들

붙였다 떼었는지

아, 몰입의 아름다운 시간들

난 정말 몰랐을까

네 몸에 바른 풀들이

다 마르기도 전

깊이 떠낸 내 가슴의 조각들

낱낱이 흩어지게 된다는 걸

진짜인 널 바라보는 일이

날 죽이는 일과 같아서

오늘도 난

네게 덧입힐 그림을 찾아

세상을 뒤적이고 있다는 걸

허밍, 허밍

허밍, 허밍    이은규


 종종 구름을 눈에 담는 습관, 당신의 폐활량이 천천히 부풀 때 그날의 공기를 부러워한 적 있다 구름을 가리키며 바람의 춤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허밍은 입술에 기대는 음악일까, 기대지 않는 음악일까


 바람의 춤이 보인다면 그건 구름의 몸을 빌렸거나 폐활량이 푸른 여름잎의 소관일 것, 구름은 바람으로 흐르고 바람은 여름잎으로 들리니까


 언젠가 고원의 사라진 호수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 수면을 맴돌던 그때의 구름은 지금 어디 있을까 가장 낮은 하늘을 흐르고 있을 호수 저편, 깃털무늬구름이거나 물결무늬구름


 당신은 잠시 구름사전 속 이름들을 덮는다 구름과 노닐기에 알맞은 바람이므로, 구름의 후렴은 음악이다 마지막 소절이 첫 소절로 흐르는 허밍, 허밍


 사라진 호수 저편

 팔랑, 수면을 깨뜨리는 나비 한 점도 좋을 오후

잔여물들

잔여물들    하재연


내가 아, 하고 말하면

너도 아, 하고 대답했는데


네가 오, 하고 말하면

나도 오, 하고 대답했는데


우리의 대화 이후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점점 커져가면서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입을 아아, 벌리고 비를 맞는다

입을 오오, 벌리고 비를 맞는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이파리들은

뿌리가 가고 싶은 곳과는 상관없이


나의 손이 네 몸에 손자국을 남겼는데

너의 머리카락이 나의 머리카락과 엉켰는데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아무렇게나 자란 열매의 씨가

나의 소식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진다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바람이 불어 키가 자라나고


빈 화분을 반짝 들어

거리에 내놓는 눈동자 속으로

비가 그쳤다는 듯 쏟아지는

햇빛, 햇빛

몽유의 방문객

몽유의 방문객    진은영


너는 오겠지, 달의 해안에 꽃들이 하얗게 밀려오는 봄밤에

너는 오겠지, 부서진 간판의 흐느낌을 가로수 검은 가지로 건드리는 여름밤에

오겠지, 추위와 얼음의 투명한 발톱으로 다듬어진 소박한 식탁에

부엌에서 다시 칼국수를 끓이려고

하얀 밀가루가 여주인의 손톱 사이에 실낱 같은 달로 떠오르는 밤에


초록색처럼 사랑스런 연인이었네, 아닌가

첫 눈송이의 흰빛으로 너는 사랑스러웠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을밤의 어두워가는 남청색 코트 자락에 기어들어가

별빛처럼 부드러운 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었으므로


꿈속을 걸으면서 너는 기억하네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식탁

부드럽고 위태로운 장소의 이름 속으로

너는 들어오겠지, 둘러앉아 우리 무얼 먹을까 궁리하며


전기 끊긴, 낭만적인 유사 별밤에서 노래도 몇 소절 훔쳐왔다네

아름답게 반쯤 감긴 눈으로 너는 기억할 수 있겠지

옛날에 한 술꾼 평론가가 먼 기차 소리의 검은 아치 아래 등을 기대던 곳

새벽의 투명한 술잔 속에 시인이 떨어뜨린 한점의 불꽃을 천천히 마시던 곳

이젠 죽은 그가 천천히 걷다가 모퉁이를 돌아가며

다른 이들의 노래로 가엽게 굽은 등을 조용히 숨기던 밤의 근처들


기다리며 책을 펼치네, 토끼며 사슴 눈동자로 가득한 페이지를

오고 있겠지, 너 오면 넘기자, 이빨이며 발톱으로 붐비는 날카로운 뒷장을

너는 꿈에 취해 오겠지, 취기로 넘기자

네가 오지 않아 부서지려는 곳

건축업자가 청혼의 반지를 들고서 기다리는 그곳


기다리네, 술 취한 돌고래처럼

너는 오겠지, 너도 모르게

부서지려는 약속의 순간으로

오겠지, 아름다운 거짓말처럼


우리가 꿈속에 서 있다

녹색과 붉은 잎을 다 떨어뜨린 뒤에 서 있는 나무처럼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이 서 있다

둥근 잎의 장소들을 다 떨어뜨리며

발끝의 고해성사

발끝의 고해성사    이은규


발끝을 세워 창가에 서면

고해성사가 시작된다, 구름을 향한

이인칭 문장이 흐르고


꽃잎이 귀띔해준 룰

초속 3센티미터로 지는 그 이름은 비밀에 부치기로 한다

말들은 공기의 미동에 따라 알맞게

바람에게서 귀동냥한 표현이거나 출처를 잊어버린 인용의 일부이기도 하다


오후를 날아가는

저 새의 모이주머니에는 잘게 찢긴 지도가 들어 있을까, 아니면 몇 알의 곡식

내 주머니를 채우는 건 나의 지론보다는 누군가의 개론


모르게 알게 지은 죄를 구름에게만 속삭일 때 도무지 어쩔 수 없다는 당신의 고해를 되풀이하는 셈

죄를 보이고 싶다, 발끝까지 추운


귀를 자르겠다는 다짐을 실행하기 좋은 시절

나라는 이인칭으로 죄를 속삭일 때 구름은 끝내 귀를 막을까 창을 부술까

당신이 들려줄 문장은 마지막까지 완성되어 있다, 방점까지도


마치지지 못한 고해는 잠꼬대로 이어지고

인칭을 잃어버린 주어만 말문이 막힌다


성사되지 않을 고해의 밤

이렇게 불안한 발끝으로

손가락이 뜨겁다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