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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 7 post

홈스쿨링 소녀

홈스쿨링 소녀    안현미


소녀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했다

 고문받는 꿈을 꾸다 착륙했다고 했다

 그 꿈은 몇번째 생의 5교시였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오늘 내게선 과학실 비커에 담긴 알코올 냄새가 난다

 비극적인 냄새가 난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혼자 놀란다

 

 안녕, 하고 당신은 서울역 앞에서 손을 흔들었지 우리는 오랜 역사가 먼지처럼 쌓인 다방에 앉았지 나는 그때도 사무원이었어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 이렇게도 해보는 거지 누군가는 도착하고 누군가는 떠나고 우리는 쌍화차를 마셨었나? 당신은 남반구에 다녀올게,라고 말했지 다음 생에 다녀올게,라고 말하는 것처럼 심상하게

 

 나는 당신을 한 계절은 의심하고 한 계절은 원망하고 한 계절은 욕하고 한 계절은 술을 따라주었지 누가 만든 미로일까? 밤과 낮 삶과 죽음 이별과 이별

 

 소녀는 겨울을 가로질러 왔다고 했다

 자신의 거울을 찾아왔다고 했다

 자신의 다음 시간은 과학시간이라고 했다

 

 오늘 내게선 과학실 비커에 담긴 알코올 냄새가 난다

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    안현미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오늘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거울 밖엔 장미가 한창입니다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처럼 무거운 음악이 흐르는 이곳을 빠져나가면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었던 초능력을 상실한지 너무 오래 다시 장미는 피는데 나는 죽은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자명종이 울리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밤입니다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물냉면을 먹고 낙산 성곽길을 내려오던 밤, 당신이 내게 건넨 다뉴세문경을 닮은 거울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에 대하여,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던 그 거울에 비쳤을 오래된 어둠에 대하여, 오래된 두려움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삼각형 무늬가 주술에서는 재생을 의미한다고 말해주던 당신의 옆얼굴에 대하여, 다시 자명종이 울리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울 속입니다

깊은 일

깊은 일    안현미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미움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불멸의 뒤란

불멸의 뒤란    안현미


가끔 내가 쓰는 모든 시들이 유서 같다가 그것들이 모두 연서임을 깨닫는 새벽이 도착한다 음력 6월 9일 오늘은 내가 죽은 날 불면을 건너온 혓바늘 돋은 내 불구의 시를 위로하려는 듯 막힌 골목 끝 '卍'을 대문 높이 걸어놓은 무당집에서 건너오는 징소리 징징징징 딩딩딩딩 내 불면의 뒤란에 핀 백색의 목련꽃은 말한다 아직은 조금 더 실패해도 좋다고 네가 켜든 슬픔 한 덩어리의 시도 시들고 시들면 알뜰히 썩을 운명이라고 크나큰 실패마저도 그렇게 잘 썩어갈 거라고 모든 연서는 죽음과 함께 동봉되어오는 유서라고 외롬이라고 음악이라고 왜 음악은 항상 고장난 심장에도 누군가와 함께 도착하고 이미 죽어버린 자들을 느닷없이 호출하는 것인지 불면으로 지샌 음력 6월 9일 오늘은 또 내가 죽은 날 너무 외로워서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뒷걸음질로 걸어갔다던 어떤 사막의 여행자처럼 불면의 밤을 뒷걸음질로 걸어가는 여자가 사라지는 손금을 들여다본다 발자국을 따라 연서 같은, 유서 같은 시를 쓰고 있는 여자가 도착한다.

사랑의 四季(사계)

사랑의 四季(사계)    안현미


꽃이 피었다

!!!

 

여름

장마가 시작되듯

사랑이 시작되었다

///////

장마가 지나가듯

사랑이 지나갔다

 

가을

(마침표가 도착했습니다)

.

 

겨울

합체란 해체를 전제로 한다?

 

그리하여

사랑이여, 차라리 죽는다면 당신 손에 죽겠다

분홍에 빠지다

분홍에 빠지다    안현미


너는 분홍 꽃, 분홍 강, 분홍 양말, 분홍 크레파스, 분홍 풍선, 분홍 돌고래를 좋아해


도도, 과가얼룩말, 바다핑크, 애빙던거북, 공룡, 아틀라스곰……

매일 수백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는 이 세계


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

너 자신의 멸종을?


새로운, 이라는 강박에만 사로잡힌 이 세계


너는 싸이 몽고메리가 탐사한 아마존의 분홍돌고래의

멸종되고 말 분홍을 사랑해


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시구문屍口門밖, 봄

시구문屍口門밖, 봄    안현미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예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 사랑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도 부정할 거예요, 전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죠, 에디트 피아프의 말이지만 그녀는 조국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부정하지도 않았어요 같은 이유로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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