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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4 post

먼 곳으로부터 바람

먼 곳으로부터 바람    이제니


빨강과 파랑이 섞이는 풍경을 보고 있었지.

밤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서.


너는 걸어 다니는 시.

울면서. 잠들면서. 노래하면서.


순간의 순간에서 순간의 순간으로

리듬으로 시작해서 리듬으로 끝나는


만난 적 없는 색깔이 섞이는 밤이다.

너에 대해 속삭이고 속삭이는 밤이다.


하나의 몸에서 나뉜 두 개의 영혼

반짝이면서 하얗게 사라지는 전날의 거울

거울의 뒤편에서 거울의 뒤편으로

머나먼 곳으로부터 오는 바람 속으로


웃음, 나는 울지

울음, 나는 웃지


언젠가 앉아 있던 잿빛의 계단

두 개에서 세 개로 증식하는 너의 얼굴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우린 이미 만났지요.


나무의 흔들림을 바라보면서. 어제의 믿음을 버리면서. 흔들리는 그림자의 윤곽을 다시 지우면서.


나는 울지, 그 대목에서

나는 웃지, 그 거리에서


멀리서 둥둥 북소리 들려온다. 숲은 고요하고 나무는 자란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사라진다. 너의 구두는 반짝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천천히. 점점 빠르게 내달리면서.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지. 말없이. 손나팔을 불듯 두 손을 흔들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춤을 추면서. 머나먼 반도의 끝자락을 떠도는 이름 없는 유랑 악단처럼. 멈추면 사무칠까 봐 더 더 걸었지. 뒤처진 쪽을 슬쩍슬쩍 바라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걸었지. 언제나 그렇게 걸어왔지. 춥고 어두운 길에선 더더욱 더.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이 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람이 불고 있었지. 숲은 어디에도 없었어. 불과 꽃. 재와 그림자. 없는 들판과 없는 언덕. 물결처럼 늘어나는 장방형의 모서리들.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 어떤 노래가 꿈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


내가 가진 몇 개의 단어

내가 말할 수 있는 몇개의 사물


하늘엔 두 겹의 구름이 층층이 부풀어 오르고

나의 늙고 오래된 개는 말이 없다

눈멀고 귀 멀어 자신의 고독 속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순간의 순간에서 순간의 순간으로

리듬으로 시작해서 리듬으로 끝나는


나는 울지, 그 계단에서

나는 웃지, 그 어둠으로


구름이 다가온다. 빛이 사라진다.

먼 곳으로부터 바람. 먼 곳으로부터 오는 네가 있다.

별 시대의 아움

별 시대의 아움    이제니


 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시대에 대한 그 모든 정의는 버린 지 오래. 내 시대는 내가 이름 붙이겠다.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의심을 하려거든 너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너의 귀를 씻어라. 언제나 우린 멀리 더 멀리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 극동의 자퐁으로 가자, 극동의 자퐁으로. 그러나 그대여, 누군가에겐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극동이다. 일곱 계단의 정신세계. 식어버린 수요일의 요리를 먹고 얼굴을 가릴 망토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날들. 차라리 녹아내리기를 바라던 유약한 심정으로. 시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가 가진 단어를 검열하는 오래된 버릇. 무한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영혼을 걸치고 혼자만의 아주 작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어제의 기억에 단호히 마침표를 찍는 사람의 마지막 타들어가는 담배가 되고 싶다. 타닥 타닥 타닥. 질 좋은 담배는 이런 식의 싸구려 발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싸구려 발상법에 익숙하다. 구토라도 하듯 목구멍에서 말들이 쏟아져내린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나비가 날고 있다. 너무 많은 바퀴 단 것들이 우루루 지나간다. 문득 비둘기 한 마리가 욕설을 퍼부으며 내 발치에 내려앉는다. 구구구 구구구. 구구단을 외우고 좀 울어도 좋을 날씨.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번 굴러야 할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 번. 후회 반성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같이 지워지다 먼지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


발 없는 새

발 없는 새    이제니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추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해.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이제니


  그 시절 나는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다락방 창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장례식 종이 울리고 비둘기 날아오를 때 불구경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일 년 내내 방학. 조울을 앓는 그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 손바닥 위로 무화과나무 열매 두 개를 떨어뜨리고 오빠도 떠나갔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무료한 휴일 한낮의 천장 모서리같이 아득했다.

 

  오빠가 떠나자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 열려진 창밖으론 끝없는 바다. 밤낮 없이 울고 있는 파도 파도. 주인을 잃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연두 보라 자주 녹두 색색 종이테이프 지우개 연필 증오 수줍음 비밀 비밀들. 도르르 어둠의 귓바퀴를 감아 넣듯 파랑파랑 종이꽃을 접으며 나는 밤마다 오빠의 문장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또 쓰는 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고백의 목소리. 오빠의 공책 위로 지우개 가루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까. 기다리는 것들은 언제까지 기다리는 것들일까. 어제의 파도는 어제 부서졌고 오늘의 파도는 오늘 부서지고 내일의 파도는 내일 부서질 것이다.

 

  모두 어디에 계십니까. 모두 안녕히 계십니까.

 

  밤이면 착하고 약한 짐승의 두 눈이 바다 위를 흘러 다녔다. 끝없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물결들.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가없음. 그것이 나를 울면서 어른이 되게 했다. 열매를 말리는 건 두고두고 먹기 위해서지.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를 씹으며 나는 자라났고 떠나간 사람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또다시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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