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 - 71 post

깊은 일

깊은 일    안현미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미움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불멸의 뒤란

불멸의 뒤란    안현미


가끔 내가 쓰는 모든 시들이 유서 같다가 그것들이 모두 연서임을 깨닫는 새벽이 도착한다 음력 6월 9일 오늘은 내가 죽은 날 불면을 건너온 혓바늘 돋은 내 불구의 시를 위로하려는 듯 막힌 골목 끝 '卍'을 대문 높이 걸어놓은 무당집에서 건너오는 징소리 징징징징 딩딩딩딩 내 불면의 뒤란에 핀 백색의 목련꽃은 말한다 아직은 조금 더 실패해도 좋다고 네가 켜든 슬픔 한 덩어리의 시도 시들고 시들면 알뜰히 썩을 운명이라고 크나큰 실패마저도 그렇게 잘 썩어갈 거라고 모든 연서는 죽음과 함께 동봉되어오는 유서라고 외롬이라고 음악이라고 왜 음악은 항상 고장난 심장에도 누군가와 함께 도착하고 이미 죽어버린 자들을 느닷없이 호출하는 것인지 불면으로 지샌 음력 6월 9일 오늘은 또 내가 죽은 날 너무 외로워서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뒷걸음질로 걸어갔다던 어떤 사막의 여행자처럼 불면의 밤을 뒷걸음질로 걸어가는 여자가 사라지는 손금을 들여다본다 발자국을 따라 연서 같은, 유서 같은 시를 쓰고 있는 여자가 도착한다.

사랑의 四季(사계)

사랑의 四季(사계)    안현미


꽃이 피었다

!!!

 

여름

장마가 시작되듯

사랑이 시작되었다

///////

장마가 지나가듯

사랑이 지나갔다

 

가을

(마침표가 도착했습니다)

.

 

겨울

합체란 해체를 전제로 한다?

 

그리하여

사랑이여, 차라리 죽는다면 당신 손에 죽겠다

분홍에 빠지다

분홍에 빠지다    안현미


너는 분홍 꽃, 분홍 강, 분홍 양말, 분홍 크레파스, 분홍 풍선, 분홍 돌고래를 좋아해


도도, 과가얼룩말, 바다핑크, 애빙던거북, 공룡, 아틀라스곰……

매일 수백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는 이 세계


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

너 자신의 멸종을?


새로운, 이라는 강박에만 사로잡힌 이 세계


너는 싸이 몽고메리가 탐사한 아마존의 분홍돌고래의

멸종되고 말 분홍을 사랑해


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야행 中

야행    편혜영


통증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소멸을 지켜보며 죽음에 대해서는 비탄할 필요도 없고 어떤 애원도 소용없으며 증오를 품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될 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 깊숙이 들어온 어둠의 농도를 살폈다. 일생을 통틀어 이만번도 넘게 검은 밤을 맞았을 텐데, 끊임없이 밤이 지나갔을 텐데, 어둠의 질감을 분간하고 그로써 시간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에 조금 당황했다.


밤과 밤이 이만번쯤 지나가는 것처럼 긴 시간이었다.


통증이 오는 주기나 횟수는 예측할 수 없었다. 강도가 매번 짐작 이상이라는 것 말고는 통증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의 법칙 中

선의 법칙    편혜영


지나고 보니 다른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뿐이다. 그때는 모두 나쁜 일인 줄 알았다. 그쁘고 좋은 일은 소소하게 흘러갔으나 나쁜 일은 내내 남아서였다.


느닷없이 귓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신기정은 그 불쾌한 소리에만 집중했다. 윤세오는 그런 소리와 문장을 잃었다. 조건 없는 애정, 묵묵하지만 다정한 응시, 보호자로서의 책무를 가지고 지켜보는 엄격한 표정을 잃었다. 밤이 꾸물거리며 흘러갔다. 두껍고 누런 옷을 입은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편할 정도로 빳빳해 보이는 옷의 질감과 화가 난 듯 굳은 얼굴 때문에 윤세오는 겁게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엄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경찰은 바빴다. 동생의 일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부검 결과를 기다린 후에 수사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신기정은 동생의 죽음이 경찰에게는 무수한 죽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윤세오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 차차 단단한 벽이 되었다. 어둡고 암담하다는 게 아니었다. 벽으로 둘러싸여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아이에게는 운을 잘 타고 태어난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오만함이 있었다. 부유한 양친이 있고 좋은 집이 있고 원하면 얼마든지 새 물건을 살 수 있고 스스로 장래를 만들기 위해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운 말이다. "이런 일은 다 절대로 그럴 리 없는 사람들이 해요. (...) 죄다 그럴 것 같은 사람들이면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사람은요, 성추행할 리 없는데 그렇게 하고요, 사기칠 리 없는데 사기칩니다. 물론 자살할 리 없는데 자살하고요." 비가 오려는지 습기 찬 바람이 불어 재가 났았다. 상자를 들고 검은 집을 천천히 돌아봤다. 이곳에는 지난 시간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불에 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많은 날이 여기에 있었다. 그것들도 불에 탔다.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    배수아


어느 날 아침 내가 네 곁에 보이지 않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내가 영원히 보이지 않으면 그건 내가 단지 보이지 않는 것 뿐이지 날 잃는 것은 아냐.

이바나

이바나    배수아


Y는 절대로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마치 맹세하듯이 침묵을 지키라고 나에게 충고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랑에 관한 언급이었다.

차가운 별의 언덕

차가운 별의 언덕    배수아


내 존재의 모든 것, 부정하지 않는다. 아름답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변명도 후회도 없이 앞으로 간다. 그리운 것이 있어도 뒤돌아보지 않겠다.


철수 中

철수    배수아


당신이 죽으면 나는 당신을 박제로 만들겠다. 그래서 내가 영원히 가지겠다. 아침의 빛과 한낮의 절망과 저녁의 광기 어린 평화를 당신과 함께 하겠다.


너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벽을 쌓고 있기만 한다. 나는 아무렇게나 기분대로 이 세상을 사는 인종들이 언제나 싫었어. 나, 너에게 의무감을 가지려고 했다.


너는 이제 앞으로 백 년 동안 나를 잊겠지. 목소리를 이 집에 남겨줘. 백 년 뒤에 이 집을 찾아온 내가 문을 연 순간 박쥐떼들과 함께 너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게.


날 태워봐. 기름을 바르고 내 몸에 불 붙여봐. 마녀처럼 날 화형시켜봐. 쓰레기 봉지로 날 포장해서 소각로 속으로 집어던져봐. 나는 다이옥신이 되어 너의 폐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지금 너에게 느끼는 것도 증오인지, 가슴속 깊이 숨겨진 단조로운 애정인지, 아니면 지리멸렬할 뿐인 이 생을 견뎌나가기 위해 어떤 극적인 감정을 연극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가족이었고 낯선 중산층이었으며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변소였었고 타인이었고 벼랑이고 까마귀이고 감옥이었다. 그들은 영원히 그들에 지나지 않았다. 제 3의 불특정한 인칭들.

1 2 3 4 5 6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