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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타임

서머타임    김이듬


발목은 시들어간다

걸음을 낭비했다

위세척을 하고 넌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여름이 제일 추워, 나는 없어질 거야

너는 눈물을 흘리며 웃지만

해가 뜰 때까지만 같이 있어줄게

풍선을 불어줄게

날아오르다가 터지겠지

꿀벌은 꽃잎 속에서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너는 내 무릎을 베고

 

아니, 널 따라하지 않아

왜 남은 날들을 신경 써야 하니

잘하려니까 심장을 멈추고 싶잖아

난 일광을 낭비할 거야 날 낭비할 거야

낮에는 커튼을 치지

많이 걷지 않고 버스에서 곧잘 자

뭘 찾으려고 넌 거기까지 갔었니

 

내 모닝콜은 거슈인의 자장가

내일 못 일어나도

여름은 살기 좋은 계절

여름은 죽기 좋은 계절

그럴 리 없지만

물고기는 수면 위를 날고 목화는 익어가는데

아빠는 부자 엄마는 멋쟁이

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아라

色    신해욱


나는 과도한 색깔에 시달린다.

내가 나빴다.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져서

색깔을 훔치곤 했다.

천연의 것들.

인공의 것들.

미안. 너의 그림자도 건드렸다.

심지어는 물에게까지 그랬다.

 

​색깔들이 불규칙하게 차올라서

나는 쉽게 무릎이 꺾인다.

나는 눈동자가 커다랗고

내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그렇지만 좋은 것들은 정말 많고

네가 있고

나는 녹이 슬고

나는 호흡 곤란.

 

​오래오래

그럴 것이다.​ 

우리 시대의 순수시

우리 시대의 순수시    오규원



밤 사이, 그래 대문들도 안녕하구나 
도로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차의 바퀴도, 차 안의 의자도 
광화문도 덕수궁도 안녕하구나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문화사적으로 본다면 안녕과 안녕 사이로 흐르는 
저것은 보수주의의 징그러운 미소인데 

안녕한 벽, 안녕한 뜰, 안녕한 문짝 
그것 말고도 안녕한 창문, 안녕한 창문 사이로 언뜻 보여주고 가는 안녕한 성희 
어째서 이토록 다들 안녕한 것이 나에게는 생소하냐 


2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세상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16세기나 17세기 또는 그런 세기에 내가 살았다면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을 것인가 

청진동(淸進洞)도, 그래 밤사이 안녕하구나 
안녕한 건 안녕하지만 아무래도 이 안녕은 냄새가 이상하고 
나는 나의 옷이 무겁다 나는 
나의 옷에 묻은 먼지까지 무게를 느낀다 
점잖게 말하는 점잖은 사람의 
입 속의 냄새와 
아침마다 하는 양치질의 무게와 양치질한 
치약의 양의 무게까지 무게를 느낀다 

이 무게는 안녕의 무게이다 그리고 
이 무게는 안녕이 독점한 시간의 무게 
미래가 이 지상에 있었다면 미래 또한 
어느 친구가 독점했을 것을 
이 무게는 미래가 이 지상에 없음을 말하는 무게 
그러니까 이건 괜찮은 일-- 
어차피 이곳에 없으니 내가 또는 
당신이 미래인들 모두 모순이 아니다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보수주의란 
현상을 그대로 보전하여 지키려는 주의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아침의 무덤이 무슨 말 속에 누워 
있는지 

말이 되든 안 되든 노래가 되든 
안 되든 중요한 것은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는 
말의 옷을 벗기는 일 
벗긴 옷까지 다시 벗기는 일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 왜 패배를 
패배로 읽으면 안 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 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 


3 
어둠 속에 오래 사니 어둠이 어둠으로 어둠을 밝히네. 바보, 그게 아침인줄 모르고. 바보, 그게 저녁인줄 모르고 

진리는 진리에게 보내고 
믿음은 믿음에게 안녕은 
안녕에게 보내고 내가 여기 서 있다 

약속이라든지 또는 기다림이라든지 하는 그런 이름으로 
여기 이곳의 주민인 우편함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비어서 안이 가득하다 
보내준다고 약속한 사람의 약속은 
오랫동안, 단지 오랫동안 기다림의 이름으로 그곳에 가득하고 

보내고 안 보내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남은 것은 우편함 또는 기다림과 나의 기다림 
또는 기다리지 않음의 자유 
거리에는 바람이 바람을 떠나 불고 
자세히 보면 나를 떠난 나도 그곳에 서 있다 
유럽의 순수시란 생각컨대 말라르메나 
발레리라기보다 프랑스의 행복 수.. 
말라르메는 말라르메에게 보내고 나는 청진동에 서서 

발레리는 발레리에게 보내고 
나는 청진동에 서서 
우리나라에게 순수시, 순수시 하고 
환장하는 이 시대의 한 거리에 내가 서서 


4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오는 도중에 오기를 포기한 비도 
비의 이름으로 함께 온다.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청진동도, 청진동의 해장국집도 안녕하고 
서울도 안녕하다.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그리워했던 안녕과 영원히 안녕을 그리워할 안녕과, 그리고 다시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다시 그리워할 안녕이 가득찬 거리는 안녕 때문에 붐빈다. 그렇지, 나도 인사를 해야지, 안녕이여, 안녕 보수주의여 현상유지주의여, 밤 사이 안녕, 안녕. 

여관에서 자고 해장국집 의자에 기대앉아 
이제 막 아침을 끝낸 
이 노골적으로 안녕한 안녕의 무게가 
비가 오니 비를 떠나 모두 저희들끼리 젖는데 
나와 함께 아니 젖고 
안녕의 무게와 함께 젖는구나. 

그래 인사를 하자, 안녕이여 
안녕, 빌어먹을 보수주의여, 안녕.

인간론

인간론    이이체


앵무조개 껍데기를 모아놓은 하얀 상자
이 형벌은 예지몽으로부터 이어진다
죄수들은 죄짓지 않고도 삶을 수감당했다

가장 창백한 불꽃과 가장 가까운 물결이 사랑이다

곤충의 정교한 눈
이 눈에는 더 많은 눈들이 있는데,
너는 다 헤아릴 수 있겠니

기적 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안주하게 되던
죄악과의 재회

천식에 걸린 바늘의 끄트머리로부터 서서히......

어떻게 젖어야 할까, 눈물로 싸인 눈동자들
서로 알지 못하는 노래
풀과 나무를 갖지 못하는 불임(不姙)의 모래를
잊지 못하리라
유년의 꽃반지, 시들 줄 알면서도

우리는 뭍에 갇힌 심해어야
소라 껍데기가 매일 우리를 부르지

사자(死者)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밀월이 온다
호박 등불이 영롱하게 빛을 반주하고
몸이 갈기갈기 찢긴 바다표범이
꾸역꾸역 울고 있었다
눈발은 자주 흩어졌다

무엇인가 더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끝이 없는 것이다

출생하면서부터 시간의 포로가 된 채로 그렇게

방패연을 날리다가 하늘에 흘려버리고는
양피지에 기록된 낡은 모계(母系)의 신화를 믿고,
믿고, 또 믿으면서, 연거푸 울고, 연거푸 울면서

그대 인간이라는 껍데기 안에서
새우잠 자는 원죄(原罪)여,
끊어지지 않는 탯줄처럼 이어질 테지

입을 벌린 채 내장을 흘리고 누운 통조림들

이미 다 끝나 있는 일을 계속하려 하는 중이다

인생에서 탈옥하지 못한 실패자들

떼로 죽어 널브러져 있는 갈매기 시체들 주위,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굶주린 부리를 치켜들고

모든 시인들은 표절당한 요절 때문에 격앙되어
울화병으로 곪고 썩는 것이다

우리가 함구해야 할 인과율에는
알면서도 외면해야 하는 모순이 있었다

어차피 늙어간다는 것은 아물어가는 일이다,
육체란 이미 상처 그 자체이므로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정적

소풍 가자 잘못된 삶들아
우리 나가서 모두
죽자
죽자
죽자

불귀 2

불귀 2    김소은


  이해한다는 말, 이러지 말자는 말, 사랑한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을 할수록 사무치던 사람, 한 번 속으면 하루가 갔고, 한 번 속이면 또 하루가 갔네, 날이 저물고 밥을 먹고, 날이 밝고 밥을 먹고, 서랍 속에 개켜 있던 남자와 여자의 나란한 속옷, 서로를 반쯤 삼키는 데 한 달이면 족했고, 다아 삼키는 데에 일 년이면 족했네, 서로의 뱃속에 들어앉아 푸욱푹, 이 거추장스런 육신 모두 삭히는 데에는 일생이 걸린다지, 원앙금침 원앙금침, 마음의 방목 마음의 쇠락, 내버려진 흉가,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쑥부쟁이, 아카시아, 그 향기가 무모하게 범람해서, 나, 그 향기 안 맡고 마네, 너무 멀리 가지 말자는 말, 다 알 수 있는 곳에 있자는 말, 이해한다는, 사랑한다는, 잘 살자, 잘 살아보자, 그런 말에도 멍이 들던 두 사람, 두 사람이 있었네,


시구문屍口門밖, 봄

시구문屍口門밖, 봄    안현미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예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 사랑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도 부정할 거예요, 전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죠, 에디트 피아프의 말이지만 그녀는 조국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부정하지도 않았어요 같은 이유로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


Everybody Shall We Love?

Everybody Shall We Love?    김선우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


딱딱한 도시의 등딱지를 열고 
게장 속을 비비듯 
부패와 발효가 이곳에선 구분되지 않아요 
그러니 잘 발효했다고 믿는 몸속에서 비벼진 밥알을 
서로의 입에 떠 넣어주듯 
그대를 밥 먹이는 게 내 피의 이야기인 듯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 
우리 사랑할래요
지나 온 가로수의 허방으로 미끄러져간 계곡과 별빛 
기어코 가시에 찔리죠 가시에 찔리고 싶어 걷는 봄날엔 
그러니 총 대신! 빌딩 대신! 군함 대신! 지폐 대신! 
건널목을 둥글게 휘어놓고 
꽃잎 물고기와 사슴을 불러 해금을 켤까요 
그대와 그대가 사랑을 나눌 때 
그대와 그대 곁에서 
그대들 위해 군함을 쪼개 모닥불을 지필까요 
무릎뼈 위에 먹을 갈아 
은행잎 댓잎 위에 번갈아 편지를 쓸까요 오세요 그대,


피 흘리는 벽들이 서로의 가슴을 칠 때 
진동으로 생겨난 샛강 같은 골목들 
그대와 나의 혈관을 이어 across the universe!
무수한 밤이 있었지만 
밤의 등골 속으로 흰 새가 내려앉는 건 드문 일이죠 
오세요, 그대가 천 번을 죽어나간다 해도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뼈마디마다 댓잎 이불 펼치고 그대 입술에 진홍꽃잎 수놓으며 
여기서 사랑노랠 부를 거예요 오래전 피 속의 벌 나비 같은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굴 거예요


포성 분분한 차디찬 
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 끝 
이것은 피의 이야기, 
사랑을 구하는 피의 이야기.


칼과 칸나꽃

칼과 칸나꽃    최정례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울음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 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별 시대의 아움

별 시대의 아움    이제니


 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시대에 대한 그 모든 정의는 버린 지 오래. 내 시대는 내가 이름 붙이겠다.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의심을 하려거든 너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너의 귀를 씻어라. 언제나 우린 멀리 더 멀리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 극동의 자퐁으로 가자, 극동의 자퐁으로. 그러나 그대여, 누군가에겐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극동이다. 일곱 계단의 정신세계. 식어버린 수요일의 요리를 먹고 얼굴을 가릴 망토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날들. 차라리 녹아내리기를 바라던 유약한 심정으로. 시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가 가진 단어를 검열하는 오래된 버릇. 무한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영혼을 걸치고 혼자만의 아주 작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어제의 기억에 단호히 마침표를 찍는 사람의 마지막 타들어가는 담배가 되고 싶다. 타닥 타닥 타닥. 질 좋은 담배는 이런 식의 싸구려 발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싸구려 발상법에 익숙하다. 구토라도 하듯 목구멍에서 말들이 쏟아져내린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나비가 날고 있다. 너무 많은 바퀴 단 것들이 우루루 지나간다. 문득 비둘기 한 마리가 욕설을 퍼부으며 내 발치에 내려앉는다. 구구구 구구구. 구구단을 외우고 좀 울어도 좋을 날씨.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번 굴러야 할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 번. 후회 반성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같이 지워지다 먼지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


발 없는 새

발 없는 새    이제니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추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해.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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