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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이야기

쓸모없는 이야기    진은영


종이

질문들

쓸모없는 거룩함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

너의 대한 감정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자비로운 기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자본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K

K    유희경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은 K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물러서거나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밖에는 바람이 앞에서 뒤로, 쓰러질 것처럼 불고 있었다.

 

쏟아지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나는 백발의 K가 부러웠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지난 햇빛이 타오른다. 불 타버린 것은 두 번 다시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K의 회색 눈빛을 훔치고 싶어 했다고 치자. 나는 그때를 떠올릴 수 없고, 상상해내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건 창문 같은 것이고 잘 닦아놓은 하얀 창틀 같은 것이다.

 

그때는 갈색 종이봉투의 질감과 구겨지는 소리. 그 안에서 풍겨 나오던 싸구려 음식의 냄새. 나는 그 종이봉투를 들고. 가는 눈을 뜨고. 어둠이 짙어오고, 탄내가 날 것 같은 자정이. 호객꾼들 거리를 뒤덮고 간판들이 가장 환해지는 그때. K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든다.

 

K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그건 내가 K를 생각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바깥에 서 있는 것. 나를 데려간, 가장 가벼운 무게의, 자리. 그는 수천의 나비가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날개다. 날개들 쌓여 달아오르는 열이다. K가 사라진 자리에 온도만 남아, 타오른다. 그때 불타버린 K는 다시, 그 자리에 설 수 없이. 흔들리는 K는 K가 아닌 바로 그 K가

다정함의 세계

다정함의 세계    김행숙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사랑에 취한 당신

사랑에 취한 당신    채호기


당신의 피가 돌아 붉은

장미여! 장미 꽃잎에 안겨

당신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는

벌이여! 나비여!


어느 햇살 나른한 오후

사랑에 취한 당신은

시집을 열었다. 갇혀 있던

시어들이 휘발하여 당신의 코를

간질이고 당신은 눈을 감는다.

당신을 사로잡는 그의 몽롱한 향취.


리듬의 팔이 당신을 끌어당기고

당신은 펼친 시집으로 가슴을 덮는다.

당신이 읽던 시행의 손가락들이

당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코와 인중, 입술을 간질인다.


사랑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당신이

받아들인 한 단어가 당신의

하얀 목덜미에 박힌다.


당신의 피를 빨아 더욱 붉은

입술 같은 장미. 구불구불한

장미 정원에 사랑에 감염된

당신의 무성한 꿈들이 오후의

짙은 그늘을 이룬다.

마르고 파란

마르고 파란    김이강


아무튼 간에 너의 목소리가 나직나직하게 귀에 걸려 있다

우동 먹다 말았어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고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이라니,
이런 묘사는 너무 외로워

처음엔 모든 게 크고 멋진 일이지만
나중엔 그런 것들도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거라고

쓸쓸히 말하던 사람이 있었지

그러니, 부디 잘 살아달라고 당부하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묘사하는 너에게

그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헤어진 애인처럼 전활 받지 않는 너에게


우리 사이에 남겨진 말들이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쓰지 않는 그것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줄 아는 너를,


너를

당장에 찾아가려 했어

그렇지만 잠깐 멈춰서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

달려가고 있다, 너에게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알고 있는

어떤 당신들에게


놓치다, 봄날

놓치다, 봄날    이은규


저만치 나비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 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은 날들이 잠시 잊힌다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앉아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푸른 밤

푸른 밤    박소란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상형문자 같은

상형문자 같은    김행숙


사람들은 목을 꺾어 인사하고, 팔을 꺾어 포옹하고, 불꽃을 쥔 손처럼 또 무엇을 꺾어서 사랑하는가.


 내 꿈을 꺾어서 너의 가슴에 안길까. 너는 내 대신 꿈을 꾸고, 나는 텅 빈 잠을 자는 동안,


 당신이 괴롭지 않다면 나는 무슨 의미가 있죠? ……칼자루를 쥐었는지……칼날을 쥐었는지…… 나는 혼동의 순간에 빛난다.


 그것은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가 남겨진 석판 같은 것이다. 무엇이 너와 닮았는가. 너와 닮은 것을 찾지 못할 때,


 무엇이 너와 닮지 않았는가. 너와 닮지 않은 것을 찾지 못할 때, 불꽃을 쥔 손으로 사라진 동물 같은 무엇을 모방하는가. 상상의 동물 같은 무엇을 꿈꾸는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잠시, 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다음에 알아본 나는 누굴까. 그다음에 내가 알아본 너는 누굴까.

먼 곳으로부터 바람

먼 곳으로부터 바람    이제니


빨강과 파랑이 섞이는 풍경을 보고 있었지.

밤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서.


너는 걸어 다니는 시.

울면서. 잠들면서. 노래하면서.


순간의 순간에서 순간의 순간으로

리듬으로 시작해서 리듬으로 끝나는


만난 적 없는 색깔이 섞이는 밤이다.

너에 대해 속삭이고 속삭이는 밤이다.


하나의 몸에서 나뉜 두 개의 영혼

반짝이면서 하얗게 사라지는 전날의 거울

거울의 뒤편에서 거울의 뒤편으로

머나먼 곳으로부터 오는 바람 속으로


웃음, 나는 울지

울음, 나는 웃지


언젠가 앉아 있던 잿빛의 계단

두 개에서 세 개로 증식하는 너의 얼굴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우린 이미 만났지요.


나무의 흔들림을 바라보면서. 어제의 믿음을 버리면서. 흔들리는 그림자의 윤곽을 다시 지우면서.


나는 울지, 그 대목에서

나는 웃지, 그 거리에서


멀리서 둥둥 북소리 들려온다. 숲은 고요하고 나무는 자란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사라진다. 너의 구두는 반짝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천천히. 점점 빠르게 내달리면서.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지. 말없이. 손나팔을 불듯 두 손을 흔들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춤을 추면서. 머나먼 반도의 끝자락을 떠도는 이름 없는 유랑 악단처럼. 멈추면 사무칠까 봐 더 더 걸었지. 뒤처진 쪽을 슬쩍슬쩍 바라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걸었지. 언제나 그렇게 걸어왔지. 춥고 어두운 길에선 더더욱 더.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이 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람이 불고 있었지. 숲은 어디에도 없었어. 불과 꽃. 재와 그림자. 없는 들판과 없는 언덕. 물결처럼 늘어나는 장방형의 모서리들.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 어떤 노래가 꿈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


내가 가진 몇 개의 단어

내가 말할 수 있는 몇개의 사물


하늘엔 두 겹의 구름이 층층이 부풀어 오르고

나의 늙고 오래된 개는 말이 없다

눈멀고 귀 멀어 자신의 고독 속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순간의 순간에서 순간의 순간으로

리듬으로 시작해서 리듬으로 끝나는


나는 울지, 그 계단에서

나는 웃지, 그 어둠으로


구름이 다가온다. 빛이 사라진다.

먼 곳으로부터 바람. 먼 곳으로부터 오는 네가 있다.

종로사가

종로사가    황인찬


 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손을 내밀고 있다 그것은 잡아 달라는 뜻인 것 같다 손이 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고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는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없이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 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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