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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상자

종이 상자   김경인



 상자를 만들어요. 십 년 됐어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상자는 잔디밭에 있어요. 흔들리지 않는 잔디 풀 옆에. 혼자 흔들리는 잔디 풀 옆에. 아니, 흩어지는 구름 아래. 매애애애 하나로 뭉쳐져 똑같은 모양이 되는 양 떼들 아래. 아니, 올라가는 층계. 아니, 내려가는 층계. 그곳에 상자는


 없어요. 아름다운 잔디밭엔 잔디가 없어요. 안녕, 엄마, 안녕, 동생아. 이제 자러 갈 시간이야. 다 버렸어요. 새 장난감들로 채웠어요. 아니, 아니, 상자 말구요. 상자는


 말이 없어요. 당신은 다 알고 있지요? 나는 칠월의 무성한 포도 넝쿨, 상자에 묶인 어여쁜 빨강 리본을 그리워해요. 상자엔 빨갛고 기다란 싸구려 노끈, 노끈 아래엔 물고기 시체. 혹시 울어요? 물속같이?


 종이가 금방 찢어질 것 같아요. 상자를 만들어요. 십 년 후에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오직 당신을 위해 찢길 상자 하나를. 당신도 알지요? 십 년 전에.

기담

기담    김경주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죄책감

죄책감    신기섭


느낌이 왔다 

등을 구부리고 앉아 떡을 먹는데 등에 담(痰)처럼 박힌 느낌, 

느낌을 보내려고 저 이화령(梨花嶺)의 병꽃나무를 바라보았으나 

거기 붉은색에 버무려져 뜨겁게 파닥대는 느낌, 추억처럼 

다시 돌아와 한 사람의 모습으로 커지는 느낌; 그는 

병든 사람이다 팔뚝의 주사자국들은 미친 별자리 같다 

등을 구부리고 한 그릇 국수를 말아먹는 그는 

지금 내 등에 박힌 느낌, 그는 이빨이 다 빠졌고 

안타깝게 면발을 놓치는 잇몸 사이로 하얀 혀가 

넌출같이 흐느끼는 소리 어두운 방에서 혼자 

그는 죽은 사람이다 더러운 요에 덮여, 지금 이 봄날 

담(痰)처럼 내 등에 박힌 몸, 점점 내 등은 구부러졌으나 

저기 병꽃나무의 붉은 품속에서 잠깐 잠깐씩 

하얗게 병꽃나무를 늙게 하는 봄볕같이 

나를 따뜻하게 늙게 하는 죽은 몸, 죽은 환한 몸, 

내 몸에 겹쳐졌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몸처럼 왔다 가는 것이었다 날마다 

그렇게 끈질기게 나를 찾아오는 몸이 있다 

이제야 그 몸을 사랑하였다

등려군

등려군    박정대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나무 아래 누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무슨 시를 쓰지, 잠시 고민하다 등려군이라는 제목을 써보았을 뿐이다


 깊은 밤에, 뜻도 알 수 없는 중국 음악이 흐른다, 나 지금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뿐이다


 모니엔 모 위에 디 모 이티엔

 지우 씨앙 이 장 포쑤이 더 리엔

 난이 카우커우 슈어 짜이 찌엔

 지우 랑 이치에 저우 위엔

 쩌 부스 찌엔 롱이 디 쓰

 워먼 취에 떠우 메이여우 쿠치

 랑타 딴딴 디 라이랑타 하오하오 더 취 따오 루찐

 니엔 푸 이 니엔

 워 부 넝 팅즈 화이니엔

 화이니엔 니화이니엔 총 치엔 딴 위엔 나

 하이펑 짜이 치 즈웨이 나 랑화 디 셔우치아 쓰 니 디 원러우

그렇다면 지금 그대들이 읽고 있는 이것은 노래인가 시인가, 등려군이 부르는 노래인가 내가 쓰는 등려군에 관한 시인가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려군의 노래나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깊은 밤에, 시란 그런 것이다


시와사상 2003년 가을호

천국에서 中

천국에서    김사과


밖에를 못 나가겠어. 길 가다 차가 오면 뛰어들고 싶어지니까.

누가 날 때려줬으면 좋겠어. 욕해줬으면, 아니 죽여줬으면 좋겠어.

근데 다들 내 탓 아니라고 위로만 해.


있잖아, 난 망해본 적이 없어. 망하는 게 뭔지 몰라. 왜냐하면 처음부터 망했거든. 태어날 때부터 인생이 쭉 이런 상태였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계속, 계속, 계속 좆같을 거라는 느낌.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이는 그런 거.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중간에서 내리라는 요구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하늘 한가운데잖아요? 여기서 내리면 나는 죽잖아요?


겨울

겨울    이준규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그래 해가 지고 있지. 그녀가 말했다. 해가 지고 있으니 뭘 할까.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술 마실까.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울지 마.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울고 있는 거 같은데.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술 사 올까. 그가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그는 술을 사러 나간다. 해 지는 겨울. 그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에 그녀는 죽지 않겠지. 그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다. 그는 가게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졌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준규 시집 「네모」 - 문학과 지성사

탄성한계점

탄성한계점    오은


나는 쉬지 않고 입술을 오무락거리지만, 가끔씩은 이 게임을 끝내고 싶어집니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말들이 줄줄 새고 있습니다. 방금 나는 ‘아름다운 너를 죽을 때까지 사랑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타인의 침대

타인의 침대    정한아


왜 나는 돌이 아닐까 썩어서 따뜻한 거름이 안 될까 왜 여전히 눈은 부시고 입술은 미풍에 벌어져 너의 손톱도 쓱싹쓱싹 자라는지 알고 싶을까 진짠지 아닌지 자꾸만 깨물고 싶을까


오감도 시제15호

오감도 시제15호    이상


죄를품고식은침상에서잤다. 확실한내꿈에나는결석하였고의족을담은군용장화가내꿈의백지를더렵혀놓았다.

홈스쿨링 소녀

홈스쿨링 소녀    안현미


소녀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했다

 고문받는 꿈을 꾸다 착륙했다고 했다

 그 꿈은 몇번째 생의 5교시였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오늘 내게선 과학실 비커에 담긴 알코올 냄새가 난다

 비극적인 냄새가 난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혼자 놀란다

 

 안녕, 하고 당신은 서울역 앞에서 손을 흔들었지 우리는 오랜 역사가 먼지처럼 쌓인 다방에 앉았지 나는 그때도 사무원이었어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 이렇게도 해보는 거지 누군가는 도착하고 누군가는 떠나고 우리는 쌍화차를 마셨었나? 당신은 남반구에 다녀올게,라고 말했지 다음 생에 다녀올게,라고 말하는 것처럼 심상하게

 

 나는 당신을 한 계절은 의심하고 한 계절은 원망하고 한 계절은 욕하고 한 계절은 술을 따라주었지 누가 만든 미로일까? 밤과 낮 삶과 죽음 이별과 이별

 

 소녀는 겨울을 가로질러 왔다고 했다

 자신의 거울을 찾아왔다고 했다

 자신의 다음 시간은 과학시간이라고 했다

 

 오늘 내게선 과학실 비커에 담긴 알코올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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