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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편지    허연


미안해, 난 너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어

지하철 안에서 가슴이 뜨겁기는 했지만,

우리도 한 번 이겨 봐야 되지 않겠냐고 비분하기도 했지만


마감 뉴스가 끝나고 자리에 누워도

대학 본관 앞 흑백사진 속에서

아무래도 너는 너무 어려


잘 가. 그대의 손이 얼굴이 가슴이 두 팔과 다리가,

아무것도 끌어안지 않고 아무것도 체념하지 않도록,

인간의 삶과 인간의 죽음을 체념하지 않도록


그대는 그곳에 있어 열아홉 살의 그대가, 힘 없는 그대가,

힘 없는 그대의 우주가 꽃을 피우고,

다시 또 어지러움 속에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대가 온전히 흙이 될 때까지 난 또 뜬눈이야.

불탄 방 - 너의 사진

불탄 방 - 너의 사진    강정


방 안에서 문득 꺼내본 당신의 얼굴이 젖어 있다

머뭇거리던 당신의 마음이 한순간 멎는다

불빛이 죽은 먼지처럼 이글거린다

벽면을 바라보던 눈알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금싸라기처럼 만개한다

내 몸과 공간 사이에 경계가 사라진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

이 우주에 더 이상 밀월은 없다

별과 병

별과 병    이혜미

 

왜 어떤 밤은 숯처럼 묻어나고 어떤 시간은 깨어져 빛나는 유리 조각이 되나 얼음으로 가득 찬 입을 열어 창백해진 이름을 부를 때


 입속에서 외계의 돌이 씹힌다 밤의 검은 가루를 몸에 새겨 불길한 문신을 엮고 지난 꿈들을 위해 신전을 차려야 하는가 혀 밑으로 깨진 별을 숨기면 몸속의 돌들이 일제히 달을 향해 빛났다


 낯모르는 이의 손톱을 태워 연기를 마시면 다른 몸을 얻은 것 같다 뼛속으로 빛들이 스며들어 살이 깊숙이 녹아내리는데 왜 어떤 몸은 부딪혀 불꽃이 일고 어떤 몸은 꿈속에 얼룩으로 머무르는가

독주회

독주회    성동혁


너는 언제쯤 우리라는 말 안에서 까치발을 들고 나갈거니

내 시집의 번역은 죽어서도 네가 맡겠지만

너 말고는 그 누구도

아픈 말만 하는 시인을 사랑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먼 곳에서 오역들을 모아 편지를 만들 것이다

잘못된 문장들을 찾다 보면

우리가 측백나무 밑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견딘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아마 그때도 사랑이 오역에 의해 태어났단 걸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불구덩이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나를 홀로 두지 마소서 (이 부분에선 네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나는 더 이상의 불을 삼킬 수 없습니다

매일 기도한다

지상은 춥고 외로운 지대라 믿었다 등고선을 이으며

슬픔은 직선으로 왔는데

그릴 때만 곡선이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우리의 얼굴은 참 구불구불하구나

어느새 낮아지고 높아지는지도 모르게 이어졌구나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조용미


빈소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 것 같다

며칠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읽지 못할 긴 편지를 쓴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천천히

멱목을 덮었다

지금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길고 따뜻했던 손가락을 느끼며

잡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으며 우리의 다짐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초라했는지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이곳에서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짧은 세계를

의심하느라

나는 아직 혼자다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허연



  그대는 오지 않았네. 삐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았네.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나는 들끓고 있었다. 모두 다 내주고 어느 것도 새것이 아닌 눈동자만 남은 너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서 퍼붓는 어둠 속에 너는 늘 구원처럼 다가왔다. 철시를 서두르는 상점들을 지나 나는 불빛을 피해 걸어간다. 행여 내 불행의 냄새가 붉은 입술의 너를 무너지게 했는지. 무덤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 보도블록 위에 토악질을 해대던 너를 잊을 수는 있는 것인지. 나는 쉬지 않고 빛을 피해 걸어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당신들이 저놈의 담벼락에다 대고 울다 갔는지. 이 도시에서 나와 더불어 일자리와 자취방을 바꾸어가며 이웃해 사는 당신들은 왜 그렇게 다들 엉망인지. 가면 마지막인지. 왜 아무도 사는 걸 가르쳐주지 않는지. 나는 또 빛을 피해 걸어간다.

자화상

자화상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천성)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    심보선




유물론자들은 일찍 죽는다


그들은 모순을 설파하지


자기 영혼에 불꽃을 던진 방화범


판관은 고민한다


후회는 양심의 증거인가


죄의 증거인가


法(법)은 만졌을 때 더 차가운 것을


좋은 물증으로 택하지


그러나 음유시인은 노래한다


감미로운 이끼가 풍미하는 절벽


하품과 하품 사이에서 나고 죽는


산양의 일생


평생 되새김질할 만큼


뱃속에 가득한 無(무)


기억의 치외법권에서 들려오는


영원한 헛구역질 소리


뒤돌아보지 않으리


이 삶은 내가 살고도


내가 살지 않았으니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안희연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어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게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랍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에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연미와 유미 中

연미와 유미    은희경    


당신에게 속할 수 있다면 당신의 환부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종양 같은 것이 되어서 당신을 오래오래 아프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고통을 달래느라

나에게 쩔쩔매고 배려하고 보살피겠지요



사랑한다는 말. 사랑한다, 사랑한다, 혼자 수없이 뱉아놓고도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것이 바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보면서 당신과 어떤 점이 비슷하다거나 이런 점에서 당신과 다르다거나 하는 생각밖에 할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에게서 당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행복해질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함께일 때 나는 언제나 불행했습니다. 나를 불행하게 했던 당신,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억새풀 안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신 가슴에 안기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세상에는 나를 안아주고 있는 당신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당신에게 안겨 있으면 아무에게도 내가 안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새벽에 깨어나면 언제나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데도 당신의 웃는 모습이 똑똑히 보입니다. 그 당신이 입술을 움직여 내게 잘 잤냐고 말을 걸고 베개를 돋워주고 손가락으로 뺨을 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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