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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中

철수    배수아


당신이 죽으면 나는 당신을 박제로 만들겠다. 그래서 내가 영원히 가지겠다. 아침의 빛과 한낮의 절망과 저녁의 광기 어린 평화를 당신과 함께 하겠다.


너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벽을 쌓고 있기만 한다. 나는 아무렇게나 기분대로 이 세상을 사는 인종들이 언제나 싫었어. 나, 너에게 의무감을 가지려고 했다.


너는 이제 앞으로 백 년 동안 나를 잊겠지. 목소리를 이 집에 남겨줘. 백 년 뒤에 이 집을 찾아온 내가 문을 연 순간 박쥐떼들과 함께 너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게.


날 태워봐. 기름을 바르고 내 몸에 불 붙여봐. 마녀처럼 날 화형시켜봐. 쓰레기 봉지로 날 포장해서 소각로 속으로 집어던져봐. 나는 다이옥신이 되어 너의 폐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지금 너에게 느끼는 것도 증오인지, 가슴속 깊이 숨겨진 단조로운 애정인지, 아니면 지리멸렬할 뿐인 이 생을 견뎌나가기 위해 어떤 극적인 감정을 연극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가족이었고 낯선 중산층이었으며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변소였었고 타인이었고 벼랑이고 까마귀이고 감옥이었다. 그들은 영원히 그들에 지나지 않았다. 제 3의 불특정한 인칭들.

누구시죠 당신은

누구시죠 당신은    성기완


눈부신 날이에요 당신과 아무 길이라도 걷고 싶어요 사랑해요 푸른 하늘 잉크를 찍어 그렇게 쓰는데 펜촉이 너무 날카로와요 당신도 이 눈부신 날 내게 그렇게 쓰고 싶다가도 맘으로만 그렇게 하는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다칠 걸 무릅쓰고 사랑해요라고 내가 먼저 쓰는 건 내가 시인이기 때문이고 눈이 멀어서이기도 하죠 오늘은 당신에게 연락받는 호사를 누리지 못했어요라고 쓰는 사이 당인리 발전소 건너편의 한강은 붉어지겠죠 ㅋㅋ 그래도 기뻐요 당신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 누구시죠 당신은 나를 후려쳐 아프고 즐거워요 

투신천국

투신천국    정끝별


재벌 3세가 뛰어내렸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출근한 아침 
그날 하루 부산에서만 십대 세 명이 뛰어내렸다는 인터넷 오후 뉴스를 보다가 
이런, 한강에 뛰어내렸다는 제자의 부음 전화를 받고 
저녁 강변북로를 타고 순천향병원에 문상간다 

동작대교 난간에 안경과 휴대폰을 놓고 뛰어내린 지 
나흘이 지나서야 양화대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며 
세 달 전 뛰어내린 애인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며 
내 손을 놓지 못한 채 잘못 키웠다며 면목없다며 
그을린 채 상경한 고흥 어미의 흥건했던 손아귀 

학비 벌랴 군대 마치랴 십 년 동안 대학을 서성였던 
동아리방에서 맨발로 먹고 자는 날이 다반사였던 
졸업 전날 찹쌀콩떡을 사들고 책거리 인사를 왔던 
임시취업비자로 일본 호주 등지를 떠돌다 귀국해 
뭐든 해보겠다며 활짝 웃으며 예비 신고식을 했던 

악 소리도 없이 별똥별처럼 뛰어내린 너는 
그날그날을 투신하며 살았던 거지? 
발끝에 절벽을 매단 채 살았던 너는 
투신할 데가 투신한 애인밖에 없었던 거지? 

붉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던 물먹은 시곗줄과 
어둔 강물 어디쯤에서 발을 잃어버린 신발과 
새벽 난간 위에 마지막 한숨을 남겼던 너는 

뛰어내리는 삶이 
뛰어내리는 사랑만이 유일했던 거지? 

몇 개의 이야기 6

몇 개의 이야기 6    한강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회복기의 노래

회복기의 노래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    김애란


안녕하세요.

가늠 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안녕하고 물으면, 안녕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물속 골리앗

물속 골리앗    김애란


이상한 사람들······

때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아파하면 자기도 아픔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들······

그 초록이 하도 파래, 나는 울었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中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中    김애란


   그녀는 불면의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성격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고, 지적인 동시에 겸손하며, 사려 깊은 동시에 냉철하고, 일도 잘하지만 옷도 잘 입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냉철하지도, 지적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항상 거절을 두려워하며 오해에 쩔쩔맸다. 그녀는 누군가 화가 나 있으면 ‘혹시 나 때문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으면서도 어느새 그 사람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혹은 요구하지도 않은 해명을 하고 다니며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람 앞에서 ‘그게 아니고…’라며 더 많은 말들을 펼쳐놔야 했다.

 

   그러나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은 그런 자신의 약점을 누군가 알아차렸으며, 속으로 경멸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꿔보려 했다. 그녀는 변명만 하고 사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를 견디고 사는 일이란 얼마나 더 외로워야만 가능한 것인지. 그녀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뭔가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할 때마다 곤욕을 치르곤 했다. 누군가와 통화할 때, 그녀는 저쪽의 숨소리, 머뭇거림, 말투와 어조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정말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인지, 미안해서인지, 내가 만나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하자고는 못하겠지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것인지, 예의상 그렇게 하는 것인지’ 고민한다. 그녀는 ‘그쪽이 편한 곳에서’나 ‘그쪽 편한 시간에’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려하고 있지만 자신이 배려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해야만 했던 말들은 잘 못하면서, 하지 않아도 좋을 말들은 잘한다.

   만약 누군가와 밤새 술을 마셨을 경우, 그녀는 먼저 일어나겠다는 말을 못한다. 반대로 상대방이 그만 일어나자고 할 경우, 그녀는 속으로 ‘이 사람 여지껏 지겨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자신이 한없이 눈치 없는 인간처럼 생각되고, 그러면 예의 바른 인간이라도 되어보자 싶은 마음에 ‘제가 괜히 오래 붙잡아둔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녀는 결정하거나 선택하는 일만큼 거절하는 일도 능숙하지 못하다. 그녀는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는 사람 앞에서 끊임없이 ‘안 된다고 해. 싫다고 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번번이 ‘네’라든가 ‘제가 할게요’라고 말해버린다. 가끔 용기를 내어 거절했을 경우에도 ‘그 사람 상처받았으면 어쩌지?’ ‘나를 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고민하느라 잠 못 이룬다. 

작별

작별    주하림




나는 그것들과 작별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향해 가요

-배수아 「북쪽 거실」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 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픔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너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너는 나를 사랑스럽다고 여겨줄까.

그래서 어느날엔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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